주역점 치다

파종은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외손자들을 위한 행사라 구분 동작을 조금 복잡하게 했다.

우선 대파라는 이름표를 다는 일부터 시작한다.

놈이 삐뚤삐뚤한 글씨로 유성 사인펜으로 작은 팻말에 이름을 쓰게 한 뒤 심을 넣는다.

그다음엔 호미로 화내는 걸 보여준 다음 놈에게 시킨다.

힘 조절이 안 돼 깊게 팠지만 꾸짖지 않고 조금만 긁도록 교정해 준다.

놈이 화가 났을 때 나는 골에 흙을 뿌려 놓는다.

놈은 헛소리를 한다면서 자신과 교대하라고 한다.

하지만 헛소리는 손이 작아서 더 안 되니 곧 본래의 임무로 돌아간다.

그 일이 끝나면 놈에게 파씨를 조금 나누어 주고, 저쪽에 앉아서 내 흉내를 내게 한다.

이것은 손가락이 가늘어서 녀석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녀석의 결점은 끈기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파종이 끝나자 아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 버리고 나는 물주기까지 마치고 어제 작업을 하다가 중단한 동남쪽 밭으로 간다.

우선 퇴비가 부족해 중단됐던 동남단 밭에 어제 사온 퇴비를 뿌린다.

어제는 나로서는 엄청난 일을 시도한 날이다.

퇴비를 과감히 뿌려 보면 부족한데, 그렇게 과감하게 할 수 있던 것은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척한 연기농협이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지 않은가. 실제로 어제 오후 아내로부터 차 키를 빌려 혼자 농협에 가서 퇴비 4포를 사가지고 돌아오는 큰일을 치렀던 것이다.

30분도 안 걸렸어. 이제는 정말 독립된 인간이 된 것 같아.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한 칸이 내 땅이라 그런지 나는 땅을 만지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몸에 투석액을 넣은 상태에서 삽을 쓰거나 곡괭이를 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좋아하지만 힘든 일이니까, 이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다.

삽으로 두 번에 한 번은 숨을 고르고 전체 모양을 다듬는 일은 끝냈다.

두께가 6개가 나온다.

그중 하나는 가장 후미진 곳에 부추를 옮겨 심기 위한 곳이고, 나머지는 현재로서는 고구마가 들어가는 곳으로 상당히 깊게 바꿨다.

일단 전 국토를 경작하고 토양 살충제와 퇴비를 뿌려 형태를 갖추기는 했지만 이제부터가 진짜다.

흙을 하나하나 삽으로 뒤집어 퇴비와 흙을 섞어 돌을 고른 뒤 모양을 편안하게 다듬는 일인데, 덩어리진 흙을 풀어 돌을 고르기 위해 계속 굽혔다를 반복하는 일이라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물론 남들은 이러지 않지만 나는 이러다가는 계속 불편하고 정신건강에 안 좋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처음부터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내년이면 이 또한 투자다.

일단 오늘은 6행 중 2행을 처리한 뒤 완성된 부분을 돌아보며 혼자 감탄한다.

남은 밭은 오늘보다 난도가 훨씬 높은 밭이어서 걱정이다.

작년에 이곳에 고구마를 심은 교육장이 고구마를 캔 뒤 그 줄기를 그대로 묻어 두었는데 지금 보니 아직 썩지 않은 줄기가 얽혀 있어 밭을 파기가 많이 어려워진 것이다.

전체 모양을 만들기도 어려워 삽으로 줄기를 자르며 겨우 길을 냈는데 뒤집기에는 몇 배나 힘이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당장 서두를 것도 없으니 2, 3일 시간을 갖고 하기로 했다.

시작은 어렵지만 내 경우는 일단 시작하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어느덧 오후 2시가 되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여전히 식욕이 있다.

어제는 근대 된장국이었고 오늘은 콩나물국이었지만 둘 다 먹을 수 있다.

아내에게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자 아내는 음식은 그대로인데 내 입맛만 바뀌었을 뿐이라며 음식이 맛이 없다고 느낀 것은 순전히 내 입 탓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럴 수도 있어 요즘은 아침 식사를 안 하고 오전엔 꽤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았나. 휴대전화를 보니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안내문자가 나왔다.

휴먼 에듀피아라는 곳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것이다.

접속해 보면 궁금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포기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해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인데 이 일을 추가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있다면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 막연하게 응모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동 겸 아내의 지시에 따라 홈플러스에 들르기 위해 집을 나선다.

활짝 핀 꽃강변을 한 바퀴 돈 뒤 홈플러스에 들러 버터와 간장 계란 등을 산다.

집에 돌아와서 문득 주역점 숙제가 생각난다.

사실 어젯밤에는 꿈속에서 줄곧 주역점을 따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만 계속 나오지 않고 같은 일을 반복했다.

어쩌면 오늘 밤에도 그런 일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이라도 숙제를 끝내야겠다고 결심한다.

점사를 건강에 대한 질문으로 두고 척전법으로 구리 3개를 여섯 번 던져 사상을 이끌어낸 뒤 그에 맞는 점괘를 찾아냈다.

산수몽이라는 괘가 나오고 구이괘가 변효로 나타나면서 산지괘가 지괘가 됐다.

점괘는 뽑았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우선은 주역에 나오는 괘사와 효사를 보고 나름대로 짐작이 가지만 아무리 끼워 넣어도 이 괘는 건강 문제와 연결시키기 어렵다.

그렇다고 다시 동전을 던질 수는 없고 순수한 마음으로 의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직 길하다고 판단한다.

나는 점이란 걸 싫어하지만, 주역점을 인생지도라는 말은 마음에 든다.

지도는 가야할 길도 알려주지만 가지 말아야 할 길도 알려준다.

어쨌든 답은 사람 자신이 갖고 있고 점은 그것을 상기시키고 격려하는 작용일 뿐이다.

그렇다면 주역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동양학과에 편입한 것은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죽을 때까지 몰랐던 일을 알았다고나 할까. 지금은 숙제를 위해 해 보았지만, 앞으로 자주 이 재미있는 장난을 쳐 볼 생각이다.

비밀을 찾는 것이 인디애나 존스나 셜록 홈스의 전매특허는 아니지 않은가. (2020.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