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상반기 극장이 거의 마비된 것을 기억한다.
그러다 2020년 하반기가 끝날 무렵 개봉을 미루던 주옥같은 영화들이 앞다퉈 개봉하기 시작했다.
2020년 11월에는 그 영화를 한꺼번에 보기도 바빴다.
올해는 이미 2020년 체험하기도 했고 2021년 11월부터는 위드코로나, 백신패스 등의 도입이 시작돼 어떻게든 극장가를 활발하게 하려는 조짐이 보였다.
어쨌든 202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2021년에는 2020년보다 조금 더 많은 좋은 영화가 개봉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021년에도 2020년 정도 영화관에 자주 갔다.
외식을 일년 내내 거의 하지 않은 반면 극장은 일주일에 한 번, 어떤 때는 두세 번 불사했던 것 같다.
극장에서는 음식을 못 먹고(아주 조금만 풀린 때가 있었지만), 여전히 거리두기 좌석제를 운영하고 있고 2021년도 들어 저는 완전히 프리랜서가 됐기 때문에 극장 포맷과 시간 선택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난해보다 더 많은 개봉 영화를 보고 지난해에는 두 번 볼 것을 한 번 보는 등 몸을 사리기도 했지만 올해는 특별히 그렇지 않았다.
블로그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이야기를 따로 하지 않았지만, 2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들러 올해 개봉작 혹은 내년도 개봉작을 미리 보기도 했다.
베스트 10 영화를 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해 영화는 지난해처럼 때마침 ‘꼭 이거야!
’ ‘하고 싶은 영화가 별로 없고, 고만고만한 1~3위 정도의 상위권을 주고 싶은 영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목록은 2021년 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국내 개봉작을 기준으로 했다.
늘 그렇듯 순위는 10위에서 1위까지의 순이다.
10.< 모가디쉬 >
2021년 최고의 흥행을 가져온 한국 영화가 아닐까 하는 ‘모가디시’. 2020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유일하게 그걸 깨고 두 번 본 영화가 바로 <모가디시>다.
실화를 바탕으로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류승완의 장점만을 엮어 만든 블록버스터 영화. 전작의 실수 없이 매끄러운 결말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구교환.입장과 퇴장 방식 모두 좋았다.
9. <퍼스트카우>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 등을 보며 단숨에 최애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켈리 라이커트 감독의 신작. 19세기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우유가 귀한 시대,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이 주를 이루는 버디 무비. 켈리 라이커트 감독 특유의 자연을 다루는 연출, 그리고 건조한 시선으로 진행돼 마지막에 큰 울림을 선사하며 맺는 결말이 이번에도 역시 좋았다.
2021년에만 서부극이 2편 잇따라 개봉했는데 워낙 서부시대 이야기가 좋아서 즐겁게 관람했다.
8. <라야와 최후의 드래곤>
개봉 당시부터 좋다고 노래를 불렀던 바로 그 영화.디즈니 픽사가 아니라 디즈니의 새 영화다.
디즈니 최초의 동남아 공주가 등장한다는 사실로 화제를 모았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메콩강의 문화에 대해 배우고 넓게는 동남/동북아 문화권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제작진이 만들었기에 물의 묘사와 표현이 정말 최고이고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붕괴된 세상, 그 뒤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물, 남겨진 ‘최후의 드래곤’의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보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 링크로 ▼ 나는 원래 픽사나 디즈니 영화의 더빙 개봉을 대체로 즐기거나 선택한 적이 없으며, 원래의 성우가 연기한다… blog.naver.com
7. <콰이어트 플레이스 2>
보는 내내 긴장을 풀지 못했던 수작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속편.’공포’나 ‘크리처’ 혹은 ‘재난’으로 분류된 영화의 속편들은 아무래도 여러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데,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그런 것들을 통쾌하게 날려버릴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전작을 능가하는 속편이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콰이어트 플레이스 2>가 그것을 해내고 말았다.
더 넓어진 세계관과 업그레이드된 편집과 음향이 무척 만족스러웠고, 공포영화의 가뭄이었던 2021년에 제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3>가 내년, 혹은 내후년경 발매될 예정이다.
6. <페닉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베스트에 <운디네>를 넣었는데 올해도 또 크리스티안 페철트 영화를 넣게 됐다.
‘피닉스’는 지난해 개봉한 ‘은디네’보다 훨씬 앞선 2014년 제작된 영화로 2021년 7월에야 국내에 정식 개봉하게 됐다.
<피닉스> 개봉 직후 페철트 영화 특별전이 곳곳에서 열렸는데, 대부분의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크리스티안 페철트와 동시대를 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됐다.
고전 멜로드라마 장르를 계승해 비극의 누아르를 선보인 <피닉스>. 다시 생각해도 엄청난 울림을 주는 라스트 신. 피닉스의 라스트 신은 올해를 빛낸 라스트 신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5. 파워 오브 독
넷플릭스 개봉작이긴 했지만 극장에서 먼저 개봉했고 당시 개봉작으로 볼 때 이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오랜만의 신작으로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여하며 오스카로 거론되는 작품. 11월 개봉이라 조금 늦게 본 셈인데 보자마자 단숨에 ‘이건 올해의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서부극으로 시작하지만 그 안에 갇혀 있는 여러 감정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로맨스 또는 스릴러로 변한다.
영화의 호흡 자체는 느린 편이지만 처음으로 오프닝 시퀀스부터 시작해 이후 일련의 사건을 거치는 과정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결말부터 한꺼번에 폭발하는 흐름이 매우 탁월하다.
서부극 장르의 수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분명한 영화.
4. <라스트 듀엘: 최후의 결투>
<라스트 듀엘: 마지막 결투>는 개봉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좋은’을 연발하며 제발 내리기 전에 극장에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던 영화였다.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원작 소설이 있다.
맷 데이먼, 애덤 드라이버, 조디 커머, 벤 애플렉 등 방대한 캐스팅에 더 방대한 리드리 스콧이 연출한 영화. 중세의 탈을 쓰고 있지만 리들리 스콧의 ‘먹여주는 페미니즘 영화’로 스콧의 장기가 모두 집약된 작품이다.
러닝타임 152분이라는 장벽이 조금 높지만 1부부터 3부까지 시간이 순식간에 끝나기 때문에 막판에는 눈을 깜빡이며 극중 관중에 심하게 몰입하는 재미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 아직도 있다니 눈물이 줄줄 흐를 정도다.
믿고 보는 고증, 믿고 보는 연출의 리들리 스콧이 된다.
아래의 3위부터 1위까지의 영화는 포맷이 다른 극장에서 각 2회 이상씩 관람했다.
3. 그린나이트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판타지 호러이자 중세 전설인 가웨인 경과 녹색기사를 원작으로 한 영화. 뚱보 파텔이 주연을 맡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 배리 키오강이 등장해 앞뒤 고민 없이 선택한 영화다.
중세 판타지물을 현대 시점에서 각색해 재해석한 세계관이 맞고 영화 자체는 난해하고 열린 결말이지만 분명 ‘보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영화를 영화다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다만 홍보 문구에 사용된 것처럼 액션 영화가 아니라 비슷한 미쟝센과 구성 방식을 가진 영화를 꼽자면 ‘더 폴’ 정도. 어른들을 위한 동화란 바로 이런 걸 말하지 않을까 싶다.
2. <티타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보고(이 영화의 프레스 티켓을 얻기 위해 정말 고군분투했다), 당시 너무 좋았던 기억 때문에 개봉하자마자 재빨리 명필름 돌비관에서 다시 본 영화. 로우를 연출한 줄리아 듀크르노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자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전체를 보면 변화와 사랑, 두 가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이야기인데 그 전달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줄거리인 ‘교통사고로 인해 티타늄을 몸에 심어 살아가는 여자 이야기’는 영화 초반 몇 분에 불과하고, 이후 모든 이야기가 단 한순간도 예상에 맞는 것이 없을 정도로 롤러코스터 고공행진을 타는 영화다.
티타늄을 두 번째로 관람했을 때 비로소 이 영화는 너무나 슬픈 비극이자 드라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티탄>의 서사 전달 방식과 비주얼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두 번째는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진화 혹은 긍정적 탈피를 받아들이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슬픔을 나누는 대안 가족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올해의 문제작임이 분명하고 동시에 오랜 시간 기억에 남는 영화. 기껏해야 두 번째 영화에서 이런 것을 만들어내다니 듀크르노 다음이 어떻게 될지 기대된다.
1.「デューン」
올해 개봉작 베스트는 나에게는 역시 <던>이다.
도니 빌뇌브의 신작이자 엄청난 캐스팅으로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은 영화.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 세계는 완전히 각색돼 도니 빌뇌브의 스타일로 재해석됐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종종 지나친 아트워킹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듀인>이야말로 그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세계관의 집대성이자 이전 작품들에 따라 ‘사막’을 가장 잘 쓰는 감독으로서 <듀인>의 재질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동시에 아주 긴 ‘듀잉 덕후’ 한스 짐머가 정말 역작의 음향을 만들어냈다.
한스 짐머의 사운드를 듣다 보면 ‘이 사람 정말 즐거워’라는 모멘트가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개인적으로는 <DUN>을 통해 성장한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가 너무 좋았지만, 그는 마치 옛날부터 ‘폴 아틀레이데스’였던 것처럼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데니 빌뇌브가 티머시 샬라메를 ‘폴’ 역으로 캐스팅한 이유는 “샬라메는 성숙함과 천진한 표정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빌뇌브의 말대로 나이는 어리지만 일찌감치 혜안을 갖게 된 ‘폴’ 캐릭터가 너무 잘 어울린다.
티모시가 연기한 폴을 아이맥스와 돌비로 보는 재미만으로도 만족한 영화였지만 폴 주변을 이루는 조연들의 연기와 캐릭터 해석력도 탁월하다.
‘듀’는 2021년 10월부로 ‘파트2’ 제작에 들어갔다.
올해는 유독 두 번 이상 본 영화가 많았는데 정부 지원금을 쓰기도 했고, 여러모로 ‘극장’이라는 시스템이 코로나19로 인해 제한되거나 폐쇄될까 하는 조바심에 마음에 드는 영화를 더 보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위에 열거한 영화 외에 흥미로웠던 개봉작은 <매트릭스 리저렉션>, <재리카투>, <엔칸토: 마법의 세계>, <이터널스>, <서울> 등이 있었다.
아울러 정가영 감독의 첫 상업영화인 ‘연애에 빠진 로맨스’도 재미있게 봤다.
12월에 시간이 좀 없다(그러기에는 영화를 많이 봤는데) <드라이브 마이카>를 못본게 좀 아쉽다.
이 영화를 봤다면 분명 개봉 영화 베스트 어딘가에 끼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목록을 다 쓴 지 며칠이 지나서야 <노마드랜드>를 잊은 것을 알았다.
누가 이 목록을 보고 이 영화가 왜 없지? 의문을 가지신다면 번외편에서 가장 좋았던 영화는 <노마드랜드>였음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 롤이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순간을 새삼 떠올린다.
누군가의 죽음에,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영화.